이 시대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모욕한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으름은 하나의 악습이요 중독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퇴치하고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되었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게으름은 항상 비난 받았을까? 아니다. 게으름을 멋이며 여유로움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은 게으름을 미덕으로 찬양했고, “오래 살려면 게으름을 즐겨라” 라고 권유했던 느림의 철학자 삐에르 쌍소(Pierre Sansot) 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에게 이러한 명언은 이미 성공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여유’에 불과하다고 여겨 진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게으르다고 당당하게 말해도 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게으름은 나쁜 평판으로 이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신화에서부터 구전 이야기와 소설에 이르는 문학에서 적지 않게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대립관계가 발견된다. 인도의 설화에서는 두 마리의 새가 있었는데 구멍이 난 자신들의 둥지를 게으름을 피우며 고치지 않아 겨울에 얼어죽고 말았다는 내용이 있다. 서양의 동화 “신데렐라”와 같은 한국형 동화 “콩쥐 팥쥐”에서는, 부지런하고 착한 예쁜 팥쥐는 힘든 삶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되었지만, 게으르고 못생긴 팥쥐는 결국 불행한 삶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한국의 동화 “소가 된 게으름뱅이”에서는 한 가정의 가장인 남자가 항상 빈둥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소가 되어버렸다. 소가되어 하루 종일 힘든 농사일을 하게된 남자는 다행히도 사람으로 변신하는 기회를 얻었고, 지난 날을 뉘우치고 부지런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2500년 전의 고대 그리이스의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그늘에 편안히 쉬면서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가 등장한다. 부지런히 움직여 먹이를 비축한 개미는 겨울을 안전하게 보내지만, 놀기만했던 베짱이는 결국 개미에게 먹이를 구걸하러 다니며 불쌍한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보면 부지런하냐 게으르냐에 따라 행과 불행이 정해 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게으름의 대가는 벌이나 저주를 받게 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부지런한 주인공은 심성도 외모도 다 긍정적인 요소를 다 포함하여 묘사되고, 반대로 게으른 주인공은 모든 면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로써 부지런함의 가치는 어떠한 외모적, 심성적 특성이나 태도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943년 생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부지런하게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생떽쥐베리). 어린 왕자가 사는 자신의 소행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으려면 단 하루라도 부지런히 바오밥 나무의 뿌리를 파내야 하는 것이다.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는 빠름의 상징인 토끼와 느림의 상징인 거북이가 경주를 펼친다. 그런데 몸짓이 날쌘 토끼는 경기 도중 잠깐의 낮잠으로 인해 느리지만 꾸준하게 걸었던 거북이를 이기지 못하는 낭패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을 지녔더라도 잠시라도 방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고,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북이처럼 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서 게으름은 오히려 미덕이었고, 특히 사회 주류가 누려야 하는 당연한 특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게으름은 우주의 원리이고, 노동은 자유인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성숙한 민주정치는, 여유로운 자유인으로서의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유인이 미덕을 키우고 정치적 행동을 위한 ‘여유’를 즐겨야 하는 반면,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당시 민주정치의 꽃을 피운 선진 문화를 지닌 그리이스와 강성해진 로마에서는 노는 것이 중요해졌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키케로(Cicero)는 하층민인 노예는 ‘자신의 수고와 근면을 파는 천박한 자’ 로 낙인하였다.

기독교의 등장은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켰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데살로니카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즉, 노동은 생존의 필수 요건으로 묘사된 것이다. 노동이 없던 낙원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도 물질적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서 땀 흘리며 노동을 하고 아이를 낳는 고통의 벌을 받게 되었다. 19C 영국의 작가 사뮤엘 스마일즈(Samuel Smiles)는 로마인이 노동을 경멸하고 모든 일을 노예를 이용함으로써 나태해져 결국 몰락했다고 주장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유명한 경구가 있듯이, 근면을 강조하고 게으름을 비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의 문학 작품 속에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각각 미덕과 해악으로 묘사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두 가치에 대한 대립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서구의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더 부추기게 되었다. 미국 자동차의 왕 Henley Ford는 게으른 자에게 문명은 없고 행복한 기회가 차단된 실패자로 간주하였다. 회사, 학교, 대학 등 모든 공적 기관에서 성서나 경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면이 강조되고,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는 말을 인용하며 부단한 노력을 장려하고 있다. 근면은 당연히 그 결과로서 보상과 칭찬이 따르고, 게으름은 합당한 처벌과 비난이 따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많은 벌레를 잡는다”라는 프로테스탄트의 말에 대한 인용은 오늘날 종교를 떠나 어느 사회든 곳곳에 만연되어 있다. 모든 국가나 정부 또한 게으른 사람을 주변화한다. 모든 사회조직은 ‘생각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보다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움직이지 않고 게으른 사람은 오히려 불평 불만이 많은 자이고, 사회를 혼란을 야기하는 자로 몰리게 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부의 축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고 부국강병을 호소하였고, 사회 권력층과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노동의 가치는 절대화되었다. 밴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게으름을 쇠붙이의 녹에 비유하며 덜 일하는 사람들이 죄의식을 갖도록 대중에게 보급하는 데에 기여했다. 

게으름과 부지런함에 대한 가치가 형성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추적해 볼때, 성실과 근면으로 미래의 행복한 삶을 이룰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부지런함이 강조되는 물질 문명은 시간 개념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간은 돈이요 금이다”라는 격언과 함께 자본주의자는 늘 상 이윤을 충족시키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은, 오늘날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과 관련된다. 현대인은 하루의 꽉 찬 일정을 소화해야 되고, 주식시장을 실시간으로 지켜 봐야 하며, 무엇을 하든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항상 뭔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은 불안함, 열등의식을 가져오게 되고 자기 학대의 정신 병리적 증상을 야기한다. 

 ‘부지런해야 잘 살수 있다’는 당연시 된 진리를 따르는 우리는 더 우울해져가고 있다.  부지런함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여기에 매몰되어 살던 삶에서 박차고 나올 수는 없을까. 게으름과 부지런함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때인것 같다.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생활의 패턴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알파라비 카자흐 국립대 명순옥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