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으로 처녀애가 말을 타고 달린다. 말의 명주 같은 갈기와 그 애의 머리채가 바람에 휘날린다. 처녀애가 말고삐를 가볍게 당기면 말은 등에 앉은 어린 주인의 소원을 알았다는듯이 큰 눈을 흘기며 더 빨리 달린다. 그러면 만족한 처녀애는 겁도 없이 바람을 맞받아 쏜살같이 달린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카자흐스탄공화국 공훈 활동가 백 안또니나는 소녀시절부터 모험을 무릅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꼭 해내고야 마는 분별없이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짬만 있으면 말을 타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그러니 몸에 멍이 없어질 새가 없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몰래 타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격으로 하루는 그 오토바이를 산산이 조각내고 말았다. 그 뿐이랴? 도싸아프 (전소련 육해공군후원회) 회원으로 된것도 자기의 힘과 가능성을 최대한 체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낙하산을 타고 뛰여내리는 것은 그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여자들이 낙하산을 타고 뛰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것도 고려인 여자들이. 그런데 또냐는 18번을 강하하였다!!! 그 녀의 대담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그 외에도 성악협주단 단원이였으며 스포츠에도 큰 취미가 있었는데 단거리 질주경기에서는 또냐를 따라잡는 아이가 없었다. 그리고 도사아프를 다니면서 사격술도 배웠다…

그런데 어떤 가정에 이런 여아이가 태여났을까?

또냐의 가정은 우스베키스탄의 <쁘라우다>꼴호스에서 살았다. 물론 또냐가 이 곳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유능한 기계사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또냐의 말에 의하면 자식들이 엄마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구 쏘련시대에 쏘련최고쏘베트 대의원 (우스베키스탄을 대표하는)이였으니 진짜 가정을 돌볼 사이가 없었던 것이 물론이다. 대의원으로 선거되기 전에도 어머니는 꼴호스 당단체 비서로 계속 일했다고 한다. 6명의 자녀들이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자라나자 맏이가 동생들을 돌봤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한가지 철칙이 있었다. 자식들이 꼭 음악지식을 받게 되어 있었다. 부모들의 말에 의하면 유명한 음악가를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한가지 악기는 꼭 탈줄 알아야 한다고 또냐의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식 다섯이 다 음악학교를 필했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술에 큰 취미가 있는 분들이였다는 것도 그 원인들중 하나였을 것이다. 안또니나의 부모는 이미 연해주에서 살았을 때부터 블라디워쓰또크에서 있은 각종 무도콩쿨에 참가하여 여러 번 수상자들로 되였으며 또 어머니는 노래도 유창하게 불렀다. 때문에 예술에 대한 애착심을 자식들에게도 배양한 것이다. 부모들의 예술적 기예가 또냐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냐가 공부하던 중학교에서는 일주일에 몇시간씩 조선어를 가르쳤다. 다른 학생들은 조선어에 소홀하게 대하였지만 또냐에게는 조선어를 배우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와 또 여학생 한 명이 시간을 빼놓지 않고 다녔습니다. 북조선에서 온 여선생인데 우리에게 찬찬히 조선어를 잘 배워주었거던요. 이제와서 보면 내가 그 때 조선어를 배운 것이 후에 저의 배우직업 선택에서 큰 역할을 놀았지요 – 백 안또니나 배우가 말한다.

중학교 졸업생들 중에 또냐와 또 한 명의 여학생의 졸업증에만 한글이 과목으로 들어있고 점수가 적혔다. 또냐의 시야를 넓히는데서 그의 집에 있는 가정 도서관이 또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아버지가 책을 읽기를 좋아했기에 자식들도 책을 많이 읽도록 설득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다 이 집의 큰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가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안또니나는 중학을 졸업한후 의료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시기에 조선극장 배우들이 해마다 꼴호스들에 순회공연을 다녔다. 고려인들이 집합하여 거주하는 꼴호스이니 그 곳에서 사는 주민들이 손바닥같이 빤히 보였다. 빛나는 눈동자, 아릿다운 미모의 처녀애가 배우들의 주목을 이끌지 않을 수 없었다. <딸애를 극장에 보낼 생각이 없는가?>하는 질문을 또냐의 부모들에게 던진 일도 몇번 있었다. 아버지는 또냐가 배우의 직업을 전공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배우가 될 생각이 있으면 극장에 가서 한번 시도를 해 보려무나…> -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국어를 알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것이 극장에서 일을 시작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리함덕 선생의 집에서 근 일년 살았는데 그 과정에 많을 것을 배웠지요. 그리고 최봉도 선배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장가갈테…>라는 희극에서 내가 첫 역 (손녀)을 놀았습니다. 이미 경험을 쌓은 배우들도 무대에 나갈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고 하는데 첫 공연을 앞둔 나의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가를 상상하실 수 있겠지요…- 안또니나가 첫 공연을 회상하면서 말한다.

안또니나는 극장에서 일하면서 박 쎄르게이와 면목을 익히게 되었다. 쎄르게이의 아버지인 박 와씰리도 고려극장에서 일했는데 그는 타스켄트 극장예술대학을 필한 배우 2세에 속한다. 그가 주역은 놀지 않았지만 친기스 아이트마또브의 <어머니의 전야>를 비롯하여 기타 연극에서 그가 논 역이 관람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쎄르게이는 어릴적부터 계속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극장에서 거의 살다싶이 하면서 극장생활을 눈여겨 보았다. 그래서 그가 전혀 다른 직업을 전공 (크라쓰노야르쓰크 광산야금 대학에서 공부하던중이었다) 하려고 했지만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그의 마음속 한 구석에 항상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직업을 바꾸었다. 쎄르게이는 희극배우로서 인기가 있었다. 안또니나와 쎄르게이는 극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고 가까워졌다. 또냐는 이런 름름한 남편과 임의의 난관을 다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쎄르게이와 부부생활을 하는 과정에 또냐는 자기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들을 낳고 화목하게 사는 부부를 보면서 극장 동료들도 기뻐하였다. 그들은 함께 극장-예술 대학도 졸업하였다.

그런데 우리 생활에서 때로는 그렇듯이 불행이 갑자기 왔다. 사랑하는 남편이 심장병으로 불의에 사망하였다. 안또니나는 앞이 캄캄하여 앞으로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두 나래가 다 불러진 새와 같았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였다.안또니나는 스트레스로 하여 거의 일년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가장 근심한 것은 그 스트레스가 배우의 기예를 잃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배우들 중에는 큰 충격을 받은후에 역을 더는 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또냐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아들을 자래우면서 극장생활에 몸담았다. 그러나 어려움에 부닥칠 때면 <이럴 때 쎄르게이가 곁에 있었더라면 풍부한 유머로 나의 기분을 북돋구어 주고 난관도 같이 나누어 주었을걸...>- 이런 생각에 사랑하는 남편이 한없이 그리웠다…

지금 백 안또니나는 극장의 주도적 배우로서 극장 지도부와 관람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아들 알렉싼드르도 일하던 회사를 떠나 현재 사물놀이 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어머니의 곁에 있어주면서 받들고 있다. 얼마전에 고려극장은 둘라트 이싸베꼬브의 연극 <여배우>를 가지고 런던에 다녀왔다. 극작가의 탄생 75주년에 즈음하여 런던에서 있은 카자흐예술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려극장 배우들이 갔던 것이다. 안또니나의 말에 의하면 세 극장의 <여배우>연극을 구경한 후에 고려극장의 <여배우>가 뽑혀 런던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극장계가 주역을 논 백 안또니나를 비롯하여 고려극장 배우들의 연기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2년전 즉 2015년에 백 안또니나는 예술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공로로 <카자흐스탄공화국 공훈활동가>라는 고상한 칭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이행한 여러가지 역들 중에서 어떤 역을 가장 잘 된 것으로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지요?

-그런데 어떤 역이 잘 되었다고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배우는 임의의 역에 자신을 몽땅 다 쏟아붓거던요, 그래서 작은 역을 놀기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작은 역에서 그 주인공의 모든 면이 다 들어나도록 놀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내가 이미 이행한 역을 뒤돌아 보면서 그중에서 어떤 역을 더 잘 놀수가 있었는데하는 생각은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난 해에 극작가 둘라트 이싸베꼬브의 연극 <여배우>에서 안또니나가 주역을 담당하였다. 주인공 아이굴 아싸노바의 생활에는 성공과 실패도 있었고 자체희생과 실망도 있었다. 배우 자신의 생과 공통점이 있은 것이 연극에서 백 안또니나 배우에게 성과를 가져왔다. 백 안또니나 배우의 60주년일에 즈음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라는 연극에서 안또니나가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여주인공의 역을 놀았다.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게 되는 모녀간 갈등, 비록 성공하는 여성이라도 외로움을 달랠 사람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현재 고려극장에 젊은 배우들이 많은데 배우들의 후계성에 대해 좀 이야기 해 주었으면 합니다

-고려극장에서 이상 세대의 배우들이 젊은 배우들을 가르치고 경험을 넘겨주는 것이 전통으로 되여 있습니다. 저역시 선배들에게서 배웠고요 또 이제는 가능한대로 젊은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극장지도부가 젊은 배우양성에 큰 주목을 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극장장 니 류보위 아브구쓰또브나는 배우가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를 믿고 그에게 꼭 기회를 줍니다. 바로 그 믿음이 배우의 직업을 전공하려는 젊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극장장에 대한 말이 났으니 말인데 류보위 아브구쓰또브나는 자기 직원들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극장 직원 각자가 이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유명한 작가 김 아나똘리는 <..어린 시절에 아이가 처음으로 본 그 나라의 지형이 사람의 마음을 형성한다>고 썼는데 이에 동의하는지요? 예를 들어 김 아나똘리는 더위에 타는듯한 초원위에 솟은 태양의 숭배자입니다. 바로 이 풍경이 미래의 작가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안또니나의 경우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아시겠지만 어릴적부터 나는 보통 범위를 벗어나는, 이를테면 극한적인 것을 좋아했거던요. 그래서 말이나 오토바이를 타면 전 속력으로 달려야 했고 낙하산도 타고 뛰여내린 것이겠지요. 때문에 성격이 침착한 측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동시에 이와 반대로, 봄비가 온 뒤에 바람에 넘실거리는 새파란 수양버들잎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를 좋아 했구요, 하늘에 고운 칠색무지개가 어떻게 낮게 드리웠던지 지평선 끝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 걷잡아보고 싶은 생각도 났습니다…그러니 낭만적인 성격도 좀 있는가봐요…

-감사합니다.

남경자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취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