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고려일보> 주필 김 꼰쓰딴찐은 받은 우편물을 뒤적이다가 기쁨을 우리와 나누었다:

-또 모스크바에서 편지가 왔는데요!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가 우리 집을 다녀간지 이미 10년이 넘었는데 잊지 않고 계속 편지를 보내거던요…

이 사연은 6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쟁시대에 모두가 겪게 된 불행, 철수는 러시아에서 온 옥슈꼬브네 가정과 카자흐스탄을 가깝게 하였다. 이런 친근한 관계는 한 때 연해주로부터 강제이주되어 카자흐스탄의 우스토베에 정착하게 된 고려인 가정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손들의 감사와 영웅적 행동으로 가득 찬 이 역사의 계속은 소설의 계속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아직 기자였고 지금은 공화국 신문 <고려일보>의 총 주필의 손에 있었다.

…2007년의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사는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 옥슈께위츠가 혹시나 하고 인터넷에서 찾은 번호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하였다. 79세된 할머니인 그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였다. 1942년에 14세였던 그는 어머니와 언니들과 함께 철수되여 우스토베역에 실려왔다. 그 어려운 시기에 평범한 고려인 가정이 옥슈께위츠네 가정이 살아 남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전후 시기에 옥슈께위츠네 가족들은 해빛찬란하고 따뜻한 우스토베 부락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초원의 큰 배와 같은 낙타들, 부르주이까 난로의 땔감인 키가 큰 꾸라이 풀이 어린 레나의 기억에 남았다…

옐레나의 어머니는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 계실 때의 어머니의 나이가 된 옐레나는 카자흐스탄을 꼭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였다.

…전쟁시대의 2년간은 일생을 두고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겨 두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억에 가장 좋은 일만 남았다. 카자흐스탄에 대한 추억은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에게 이 추억과 또다시 접촉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예레나는 우스토베를 꼭 찾아볼 위무가 있다고 간주하였다. 우수토베에 가서 쌀과 거처를 나눈 가정들 (유감스럽게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을 찾지 못하면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구원한 카자흐스탄 땅에라도 절을 해야 하였다.

행운이라 할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우스토베 출신인 꼰쓰딴찐이었다. 그는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의 부탁을 듣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시나이다 옌화로브나는 잠간 생각끝에 대답했다:

-오라고 해, 우리 집에 숙소를 정해도 되니까…

이렇게 마치 친척집에 오듯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가 우스토베 김씨네를 찾아왔다.

-그 나이에 모두가 그랬듯이 건강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백발이 섞인 여성이 즉시 비행기를 타고 그 먼 길을 와서는 알마티에 머물지도 않고 곧 바로 우스토베에 온 것을 보고 우리가 놀랐습니다 – 꼰쓰딴찐이 회상하였다.

고려인들은 나이의 마지막 수자에  9자가 붙을 때는 좋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 29, 39 기타 9자가 붙는 나이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이것도 꺼려하지 않고 79세에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멀지만 정든 땅, 아름다운 자연경치, 친절한 사람들을 보고 기뻐하였다.

-자식들은 물론 내가 길도 멀고 전혀 낯설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지요 –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가 말했다 – 그런데 내가 꼰쓰딴찐과 통화를 하고나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결심을 했어요.

이렇게 <고려일보> (신문사의 전화를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의손녀가 인터넷에서 찾았다)가 이 여성과 카자흐스탄을 연결하는 실머리로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였다.

…60여년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다 변했다. 전쟁시대에 우스토베역 주위에 꼴호스들이 있었는데 벼와 루크를 재배했다. 현대 도시에서 손님은 물론 그전 농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생활도 달라지고 사람들의 배려건도 달라졌다…

그러나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그의 가족들을 받아들인 그 작은 집이 있던 거리를 애써 찾았다. 집이 좁았으나 아늑하였으며 화목하게 지냈다. 끝내 그 집을 찾지 못했다. 그 자리에 다른 집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꼴호스의 광활한 전야가 기억에 떠 올랐다. 아이들은 추수가 끝나면 전야에 나가 벼이삭을 주었다. 그것을 훑어 쌀로 밥을 지으면 온 식구가 며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옐레나 할머니는 활동력이 아주 대단하였다. 그는 배낭을 지고 우스토베 시외를 걸어서 다 돌았다. 건강에 조심하라고 주위 사람들이 할머니더러 말하니 젊었을 때 스포츠를 했는데 스키를 타고 그보다 더 먼 길을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가 살던 집 근처에 있던 숲이 간데온데 없어졌다. 그러나 땅은 역시 그 땅이었고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었다. 하긴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에게 지금 거처가 필요없지만 지금도 그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맞이했을 것이며 거처를 내 주었을 것이다! 생활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우고 친척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많은 좋은 일들이 과거로 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무정해 지지 않고 네가 그 누구의 후손이라고 해서, 결국에는 그저 인간이라고 해서 존경을 품고 감사히 맞아들이는 것에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감동된다. 

전후 시기에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의 운명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머니는 딸이 고등지식을 소유하도록 하려고 큰 노력을 들였다. 레나는 모스크바 무역대학을 필하고 변호사, 영어와 중어 통역으로 일했다.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역시 이 대학에서 반세기 이상을 일하면서 훌륭한 교사가 되었다. 그는 한 때 중국주재 쏘련대사관에서 일했다. 유능한 영어전문가인 그는 동경에 있는 베를리짜 학교에서 실습도 하였다.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가 여러 나라에 가 보았지만 카자흐스탄은 그의 추억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카자흐스탄에 그의 마음의 한 부분이 남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행은 그를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난 추억을 더 풍부화시켰다. 돌아가신 어머니앞에서 실행한 의무는 그의 자식들과 손군들의 내일에 대한 확신성을 준다. 왜냐 하면 여러 민족이 준 따스함과 거처에 의해 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여러 민족들이 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서 만나서 뭉쳐서 살아남았다. 카자흐스탄에서 조국을 찾은 여러 민족 대표들의 그 통일이 오늘도 간곳마다에서 감촉할 수 있다.

이 곳에서 사는 우리들은 많은 것을 보지 못하며 그것을 응당히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카페에 들어가서 우스베키스탄 플롭, 라그만, 잡채, 베스바르마크 등 여러 민족 요리를 보았다. 또한 카자흐스탄에서 많은 행사가 국제주의적인 것으로 된 것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꾸르반 아이트와 그리스도 탄생절이 이제는 휴일로 되었고 신앙에 관계없이 모든 카자흐스탄인들이 이제는 그 명절을 이해하고 존대한다. 얼마전에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금년부터 카자흐스탄에 감사절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국제명절로 간주한다. 왜냐 하면 실지에 있어 지구상 방방곡곡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카자흐 인민에 대한 고마움으로 북받쳐 오르기 때문이다.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는 또 우스토베로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시나이다!

건강하시고 생의 기쁨을 기원합니다…하긴 이 불안안 시대에 무엇을 미리 계획하기가 좀 두렵지만 그래도 벌써 여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다시 우리 집으로 초청합니다. 손녀를 데리고 이 곳에 와서 저와 함께 2-3주간 모스크바 교외에서 휴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제가 까산쓰까야 역에서 마중하겠습니다. 쉬면서 건강을 복하십시오.

모스크바 교외는 여름철을 지내기에 아주 좋습니다: 호수도 있고 삼림도 있습니다. 시나이다 손녀와 같은 나이의 여아이가 이웃집에 있으니 손녀도 심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꼭 오십시오.

옐레나 드미뜨리예브나    

 

  진 따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