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에 재능있는 연출가, 배우 최국인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는 <카작필림>영화 촬영소가 제작한 전설적인 영화 <우리 뒤에는 모쓰크와다>에서 제 2연출가로 출연하였다. 최국인을 회상하면서 나는  상기 영화촬영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위대한 조국전쟁시기였다.     히틀러의 독일침략군은 전구라파를 거의 다 점령한후 아주 거대한 무력으로 러시아로 총진격을 개시했고  잠간동안에 모쓰크와 교외로 진출했다. 이 때 쏘련인민은 일치단결하여 구국전선에 총궐기 했으며 절대로  모쓰크와에서더는  후퇴하지 않으며   반돌격하여 히틀러 독일침략군에게 치명적타격을  가해야 하는 것을 자기들의  신성한 의무로  내세었다. 바로 이위급한 시기에 카자흐쓰딴 알마아따에서는   주로 카자흐민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으로 구성된 빤필로브 저격사단이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즉시로 모쓰크와 방위전에  출동되었다. 히틀러독일침략군은 온천지를 불바다로 전변시키면서   자기 주력을  모쓰크와로 직통하는 월로꼴람쓰크 대통로 집결시켰다.   바로 이 때 수 십대의 땅크를 앞세우고 맹사격을 가하며 진격하는 히틀러침략군의 주력을 좌절 섬멸시키기 위해 반돌격을 가하기 시작한것은  빤필로브저격사단의 전투원들이였다. 히틀러독일침략군은 계속 새무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때  빤필로브저격사단의 정치지도원인 클로츠꼬브는  

-러시아는 넓다, 그러나 우리 뒤에는 모쓰크와다.  우리는 절대로 여기서 더 후퇴하지 못한다 – 라고  전투원들에게 호소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빤필로브저격사단의 전투원들은 사단장은 물론 거의 다 전사했다.그렇지만 아직 살아남은   진투원은 계속 영웅적으로 싸웠고  이윽고 적의 주력부대의 진격을 좌절시켰다… 

… 지금 알마따공원에는 빤필로브 저격근위사단의 전투원들의 기념비가 있고 그 앞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세월은 흘렀다 .   위대한 조국전쟁이 끝난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누구도 그무엇도 잊지 않았다. 영화촬영소 “카작필림”에서 일하는  영화 연출가  마지트 베갈린은    빤필로브저격사단 전투원들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예술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빤필로브 저격사단의 한  지휘관이였든    바우릐쟌 마믜스울리는 씨나리오 작성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우리 뒤는 모쓰크와다”라는 이 예술영화의 주인공  바우릐쟌  마믜스울리의 역을

키르기시야공화국 인민배우 아르쎈 우무랄리예브가 이행했다.  

총연출가는 베갈린이며 제2연출가는 최국인이였다. 제1촬영가는  아스하트 아슈라뽀브였고  제2촬영가로서는 내가 선출되었다. 이 예술영화제작에 착수한것은  1967년 늦가을이 였다. 여러 명으로 구성된  영화촬영소 “카작필림” 예술영화 촬영집단은 우선 모쓰크와부근인 월로꼴람쓰크 대통로로 출장을 갔다.

제2연출가인  최국인이 해야 할 일은 특별히 많았다. 최국인의 첫째과업은  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우선 약 2000여명의 젊은이들을 동원시켜야 했다. 그는 재정책임자 바샤예브와 함께     모쓰크와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기관을 찾아갔다.  여기서2000명의 군인들을 예술 영화촬영에 동원하게 되었을 뿐만 아이라   그중 절반을 독일군으로   무장시키며  많은 땅크까지 동원시키는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 즉   젊은이들 1000 명에게 독일군인 군복을 입히고 무장시켜야 했고 다른 1000명에게는  붉은 군대의 군복을 입히고 무장시켜야 했다 . 

최국인의 두번째과업은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운 군인들이 월로꼴람쓰크 대통로에서  서로 총을 쏘며 진격하며  육박전을 하며 총창으로 찌르고  서로 악독하게 죽일내기를 하는 여러 장면들을 하나하나 아주 실감이 나게  구체적으로 조직해야  하는것이였다. 

최국인이가  이 두 과업을 성과적으로 해결했을 때 만이 예술영화 촬영에 착수할수 있는    기본문제들이  전부 해결된것으로  여기게 된다.  

총연출가인 베갈린은  최국인이 이 두가지 문제를 상상외의 빠른 속도로 추진시키고 있는데 대하여  대단한 만족감을 표명했다..  

 

다음으로  최국인은 빤필로브사단장의 역을 이행하는 쏘련인민배우 싸나예브에게 씨나리오에 기초하여 아군앞에 설치 되어있는 중기화점으로  들어가서 사격을 직접 지휘해야 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때 곁에 있던 나는 군복을 입고 총을들고 이 전쟁영화의 한 에피소드에 참가하고싶다는 말을 했다.  총연출가 베갈린은 크게 웃으며 찬성했다. 바로 이 때 최국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너는 붉은 군대보초병의 역할을 하되 빤필로브사단장이 중기화점으로 들어갈 때   중기화점의 문을 열고 그가 들어가면 문을 닫는 역을 놀아라.- 고 말했다.   이 에피소드의 촬영이 시작되었을 때 붉은 군대군복을 입은 보초병인 나는 문을 열고 닫는 역을  아주 진실성있게 이행하노라고  많이 노력하였다. 

이 예술영화촬영이 시작되기전에 최국인은 독일군장병 그리고 붉은군대 장병들을 불러놓고 촬영개시신호탄이 오르기만하면 전투행동을 시작해야 하며 누가 어데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중요한것은  총탄에 맞고  모두는 지정된 장소에서 쓰러져야 하는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월로꼴람쓰크대통로가 수백명의 독일군장병들의 시체로  덮여저야 한다는것이였다. 

이윽고 촬영개시신호탄이 오르자 적아의 전투행동이 개시되었다. 제1촬영가인 아슈라뽀브는 정면에서 촬영했고 나는 전투장면을 측면에서 촬영했다.  포성이 울리며 여기저기에서 포탄들이 튀며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불타는 온천지는 잠간동안에 준엄한 포연에 휩싸였고 생지옥을 연상시켰다. 독일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격하는데 이 장갑차가 포탄에 맞고 박산되자 문짝이 하늘높이  공중으로  떠올라갔다. 그런데 이 문짝이 차츰 내가 촬영하는 상공에 나타나자 이윽고 내게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겁을먹은 나는 촬영기에서 눈을 떼고 위를 바라보았을 때 이 시커먼 큼직한 문짝은 바로 내 머리우에 나타났고 지금 당장 나를 깔아버리려는것이였다. 이 때 나는 촬영기를 던지고 그자리에서 모두발로 막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문짝은 촬영기에 떨어진것이 아니라 나를 계속 추격했고 이윽고 철갑모를 쓴 내머리우에  떨어졌다.  나는 정신을 잃고 그자리에 나가자빠졌다. 많은 적아의 장병들이 이것의 증인으로 되었다. 겁을 먹고 내앞에 나타난 총연출가와 최국인은 나를 붓들고 막 흔들었다. 얼마안되어 나는 눈을  툭툭 털고 그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말하여 2천여명의 무장한 군인들이 «서로 총창으로 찌르며 죽일내기를 하는»  포탄튀는 험한 전장판에서 한명도 부상자없이 촬영을 성과적으로 끝냈다는것이다. 

예술영화 '우리 뒤는 모쓰크와다'라는  관중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고 호평을 받았다. 

영화촬영소'카작필림' 행정지도부는 최국인의 창작적 기능을 아주 높이 평가 했고 그를 창작집단의 주도적연출가의 한사람으로 평가했다. 그후 최국인은  많은 예술영화들을 제작했으며 국가상을 비롯한 많은 훈장들과 메달로 표창 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시기에 약 백만명의 카자흐민족이 전쟁에 참가했고 그중 500명이 쏘련영웅칭호를 받았다. 이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한 카자흐민족의 위훈을  한장면을 이야기하는 예술영화제작에 참가하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는 최국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고려인으로서 아무런 민족차별없이 창작사업에서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할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여준  영화촬영소 «카작필림 » 행정기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최국인은 유감스럽게 작년 4월에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에 대한 추억은 우리의 심장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김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