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는 어릴적부터 무용을 좋아했다. 거울앞에 서서 손으로 동작을 되풀이 해 보았으며 여러가지 빠 (무용의 보조)를 해 보려고 애를 썼으며 전설적인 갈리나 울라노바와 안나 빠블로바의 공연을 텔레비젼에서 보면서 자신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척주의 외상과 연관된 건강상태로 하여 나자가 직업적 무용가로 일하지 못한다는 <판결>이 내렸다. 그러나 김 나제즈다는 의사들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픔을 무릅쓰면서 직업적 무용가가 되었다.

 

정든 고려극장과 나제즈다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맺어졌다. 극장은 나제즈다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되었다. 극장의 원로인 그의 할아버지인 박춘섭 배우가 나자를 극장에 데리고 왔다. 박춘섭 배우의 운명도 극장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었다 – 그는 반세기 이상 즉 55년을 극장에 이바지 하였다.

-나는 어릴적부터 춤을 추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척주에 외상을 입어 춤을 추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 나제즈다가 회상한다 – 그런데 내가 무용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나를 문화회관 무용 크루쇼크에 등록했지요. 물론 처음에는 직업적 출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요. 그러나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벌써 그 때 우리 무용 교사가 뿌안트를 신고 춤추는  것을 배워주었습니다. 우리가 타지키스탄에서 살았기에 주로 민족춤을 추었습니다.

부모들과 함께 알마티로 이사 온 나자는 무용에 대한 사랑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 했다. 그당시 극장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아침 나자를 극장에 데려갔다. 이를테면 시험을 치루어 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그러나 나자는 당황하지 않고 잘 알고 있는 민족춤을 추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 때 곁에서 보기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자의 춤이 얼마나 순진하고 감동적이었던지 극장 지도부는 수련기간을 주는 조건으로 취직시켰다는 것이다. 젊은 무옹가 나자는 근면성, 무용에 대한 깊은 사랑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들어내고 질병도 이겨내여 직업적 무용가가 되었다.

-그 때 극장에서 우리의 총 무용연출가 김 라리싸 왈렌찌노브나가 이미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그가 저에게서 무용가의 그 어떤 잠재력을 보고 취직시킨 것 같습니다. 다음 나는 그 교사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연습을 했지요.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동작이 잘 조종되지 않았고 우아한 움직임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었으며 큰 만족을 얻었습니다. 지어 출근 길에도 버스안에서 손동작을 하니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았어요 – 나제즈다가 이야기 한다.

임의의 배우와 마찬가지로 나제즈다도 자기의 첫 공연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전통무용 부채춤이었다.

-한편으로는 큰 기쁨을 느끼고 다른 편으로는 큰 격동을 느끼지요. 그 감정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경험을 얻게 됨에 따라 그저 형태가 변할 따름이지요…어쨌던 배우는 공연을 앞두고 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부족한 점도 있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공연을 끝내고 얻는 만족감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무용가가 이야기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직업적 기예를 높이려는 소원이 생긴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젊은 배우는 주르게녜브명칭 카자흐민족 예술아카데미야를 졸업하고 연극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극장 무용연출가로 일하게 되었다. 이에 있어 나제즈다에게는 그를 양성한 정든 극장을 떠나려는 생각이 난적이 한번도 없었다. 극장은 그의 두번째 가정이 되었다. 나제즈다는 고낙을 극장과 함께 나누었다.

그는 극장이 겪던 어려운 시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관람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배우들은 몇 개월씩 봉급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예술의 성당은 공동의 노력, 성과에 대한 신심, 민족의 문화에 대한 사랑에 의해 살아남아 오늘 성과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 극장에는 임의의 창작적 사상을 실천하며 가장 대담한 구상을 구현할 모든 조건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극장의 정연된 집단적 노력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무용의 종목도 풍부해졌다. 연극에 율동적이고 표현력이 깊은 무용을 보충한 결과 연극이 보다 화려해지고 관람자들의 흥미를 더 이끌기 시작했다. 무대화된 공연이라는 새로운 공연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즉시 관람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고려극장이 무대에 올린 다수 무대화된 공연에서 김 나제즈다가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가로 나서고 있다. 

고려극장은 산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게 되며 새 것을 창작해 내고 있다. 오늘 극장이 하는 모든 창작을 관람자들이 소중히 여기며 국가가 응당히 그것을 평가하고 있다 – 극장에 가장 고상한 아카데미야 명칭이 스여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 관람자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민족예술의 세계로 이끄는 미묘한 부분을 찾아내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전통적 예술과 현대 예술을 조화롭게 연결해야 하며 민족적 색채가 다른 민족들의독창적인 문화와 결부되도록 해야 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여러 민족이 어깨를 겯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문화에 반영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금년에 우리 극장이 창립된지 85주년이 됩니다. 그중 다수 년간을 카자흐스탄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년간에 카자흐문화와 다른 민족들의 문화의 일부분을 섭취했습니다. 이런 결합에 의해 우리 공화국에는 모국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창작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창작은 바로 카자흐스탄 관람자들에게만 가깝고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민의 운명이 거기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람자들에게 흥미가 있고 그들이 새로운 것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무대장치에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용에도 전통적인 방향과 함께 조명, 음향의 효과를 이용하면서 모데른을 포함하여 가장 각이한 방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한 평론가가 우리의 무용을 보고 <여러분의 무용은 손움직임의 진짜 심포니야이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나제즈다가 강조했다 – 우리 극장 배우들을 만능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자가 그 어떤 분야 이를 테면 연극, 무용, 성악에서 특별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할 일에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닙니다. 

나제즈다 자신은 연극에서도 역을 놀았다. 그러나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무용 연출가로 진짜 날개를 폈다.

-아시다싶이 우리 극장의 특이한 점을 고려한다면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창작적 면에서 내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무용만 연출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시나리오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 나제즈다가 이야기 하였다 – 나는 고려극장에서 일하게 된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제게 마음에 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무용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어릴적에 모국어를 배우지 않은 것입니다.

요즘 공화국 국립 아카데미야 고려극장 집단 일동이 극장 창립 85주년 기념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기념일에 준비하는 공연은 간난신고를 겪은 우리 인민의 운명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의 비극적 모멘트에 주목을 집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명절 공연에는 유머가 많을 것이며 관람자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겁게 보내도록 그로테스크 형태로도 될 수 있습니다 – 김 나제즈다가 이야기 한다 – 기회를 타서 고려극장 창립 85주년과 관련하여 여러분들 모두를 축하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김 꼰쓰딴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