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 시기에 고려인 대중보도수단이 강제이주의 결과 카자흐스탄에 있게 되었지만 쏘련의 모든 고려인들의 생활을 반영했다. 쏘련붕괴 그리고 새로운 독립국들의 형성은 쏘련고려인들의 단일체를 분산시켰는바 그 결과 타스켄트, 모스크바, 상-페테르부르그 그리고 기타 러시아의 지역들에 새 고려인 잡지와 신문들이 나타났다. 경제위기, 국가기관들의 전반적 통제 거절은 정기 출판물로 하여금 국가 형태로부터 개인 형태에로 넘어가게 하였다.

(제 27호의 계속)

대중보도수단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일보>가 아직은 부분적으로 국가예산에서 융자를 받지만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의 관리하에 넘어갔다. 디아스포라의 TV와 라디오 방송은 국가체널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보청을 걸쳐 융자를 받고 있다.

6.1. <고려일보> 신문

<고려일보>는 쏘련고려인들의 신문인 <선봉>과 <레닌기치>의 계승자이고 한반도 경외에서 발행되는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신문이 1991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고려일보>는 고려인들의 일간신문을 의미하는데 일주일에 다섯번 발간되던 <레닌기치>는 한달에 네번 발간되니 <고려주보>라고 명칭을 바꿀 수 있는 근거를 준다. 게다가 한때 네호중 한 호에는 <고려>라는 부록이 첨부되어 발간되었다. <레닌기치>의 부록은 러시아어로 된 면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큰 경험이 있는 기자 김 보리쓰 알렉싼드로위츠가 편집했다. 1980년도 말기외 1990년도 초기에 자기 민족의 역사, 문화와 언어에 대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관심이 대단히 컸었다. 때문에 천 왈렌찐, 림 클라라, 방 알렉쎄이, 천 따찌야나, 채 유리, 최 레라와 같은 기자들; 작가들과 시인들인 박 미하일, 강 알렉싼드르, 리 스따니슬라브; 학자들인 김 게르만, 한 왈레리, 사진작가 안 윅또르, 화가-디자인 김 스왜또슬라브와 같은 젊은 창작 및 과학 일군들이 모여든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처음으로 타민족이 신문사에서 근무했는데 그는 질랴라 따스불라또바였다. 이 집단을 김 보리스가 지도했는데 얼마 지나서 림 클라라가 그를 대신했다. 그는 러시아어로 된 부록 <고려> 주필의 직책을 차지했는데 러문 부록은 실지에 있어 신문속에 든 신문으로 되었다.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이상에 지적한 정직원들과 정원표에 들지 않는 (그들은 원고료를 받는 조건으로 일했다) 직원들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이 신문사를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하였고 혹자들은 카자흐스탄을 떠났으며 또 다른 사람들 (우스베키스탄 기자들)은 <외국인들>로 되여버려 타국의 신문사에서 공식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조영환 주필이 잘못하여 국가후견과 예산에서의 융자를 거절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일보>가 공식적으로 그런 독립을 얻었으니 이제는 신문이 자체융자에 목표를 두어야 하였다. 그런데 계산 (만일 그런 계산을 했다면)은 현실과 어긋났다. 신문사에는 물질적 토대도 없었고 재정 수단도 없었다. 첫 시기에는 신문이 설립자인 BACKA 전 부회장 허웅배의 도움으로 신문이 발간되었는데 일주일에 다섯 호가 아니라 세 호가 발간되었다. 한국어를 소유하지 못한 독자들이 많은 것을 고려하여 토요일 호를 러시아어로 부록으로 발간하기로 하였다.신문의 처지가 어려워졌다. 이것은 우선 재정형편이 악화되고 한글로 쓰는 기자들이 신문사를 떠나는 것과 연관되었다. 그들은 한국 회사, 교회 기타 기업소들에 취직하거나 자유로운 통역원들로 일했다. 왜냐 하면 그런 직장에서는 기자들이 신문사에서 받던 것 보다 봉급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신문의 부수도 급격히 줄어 들었다. 만일 쏘련 붕괴전에 1만 2천 – 1만 5천부였다면 1993년 말에 가서 구독자 수가 400명까지 줄어 들었으며 실지 부수는 100-150도가 더하였다. 재정위기는 쏘련 시기에 발간되던 모든 국가신문들에 영향을 가했다. 일부 출판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전혀 없어졌기에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쏘련이 붕괴되고 자주 국가들이 형성됨에 따라 이전 공화국들과 나라의 지역들간에 여러 면에서 연계가 끊어졌다. 생활수준이 현저히 내려가고 신문의 가격이 인상하고 신문이 제대로 배달되지 않는 것도 부정적 후과를 가져왔다. 과도의 통화팽창의 조건에서 인쇄소의 소비가 뛰여 오르는 것으로 하여 신문사가 인쇄소의 소비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었다. 만일 1991년에 신문 발간, 신문 배달에 드는 소비가 1백 50만 루블리였다면 같은 해 말에 가서 그 소비가 10배이상 늘어나 12-15밀리온 루블리에 달했다.

그런데 객관적 원인외에 주관적 성격을 띤 과오도 있었고 신문사의 사업에 결함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 가을에 적극적으로 전개하던 독자모집이 실지에 있어 중단되었다. 이전에 독자모집을 정치적 행사로 간주하고 그의 성과적 진행에 대해 모든 기업소와 기관 (즉 학교부터 시작하여 꼴호스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들이 책임을 졌다. 상기 독자모집 체계가 끝난후에 신문 구독을 선전하는 새로운 형태나 광고가 나타나지 않았다.

1994년부터 시작하여 신문사의 활동에서 사업이 얼마간 개선되어 부수가 4500도에 달했다. 그러나 어려움은 계속 남았다. 신문 구독료가 해마다 인상하여 난관을 조성했는데 1998년 1월 1일 현재 1742뎅게를 이루었다. 만일 1980년 중순에 년 구독료가 월 평균 봉급의 5%가 채 되지 않았다면 10년이 지나 구독료가 월 봉급이나 연금의 거의 절반에 해당했다. 1998년부터 신문이 주로 카자흐스탄 지역내에서 보급되었다. 그것은 공화국들간에 이전 연계가 위반되고 구 쏘련의 이전 공화국 은행들 간에 상호계산이 정돈되지 않았고 신문을 송부할 때 관세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이다. 1997년 후반년부터 16면 (A-3)이였던 신문이 12면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국가는 1998년까지 <고려일보>를 비롯한 민족신문 유지에 보조금을 지출했다. 보조금은 그럭저럭 존재하는데 필효한 소비의 근 60%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9년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 출판 및 사회합의 청은 지출액을 현저히 줄여 총 년간 예산에 계획된 액수의 30%까지 줄였다. 이 원인으로 <고려일보>신문사는 인원을 최소한 줄이게 되었고 신문을 12면에서 8면으로 축소하고 신문이 월 4호대신 2호가 발간되었다. 이런 상태로 신문이 몇 개월간 발간되었다. 달마다 형편이 더 어려워 갔다. 인쇄비와 건물임대비를 비롯하여 빚이 커 갔고 사원들은 몇 개월 째 봉급을 받지 못하면서 일했다. 신문이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카자흐스탄주 대한민국 최승호 대사가 신문사를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 나섰다.

1990년 말에 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 출판 및 사회합의 청은 <고려일보>를 비롯한 모든 민족신문들을 사유화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입찰을 통해 신문들을 몽땅 개인 손에 넘겨주려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가 <고려일보>를 사유화하겠다는 소원을 말했다. 2000년 1월 1일부터 <고려일보>가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의 소유로 되었다. 국가예산에서 부분적으로 융자를 계속하고 협회가 투자하였으며 카자흐스탄의 경제상황이 점차적으로 개선됨에 따라 이미 발간되던 형태로 신문이 비교적 안정하게 발간되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관심이 신문의 평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준으로 된다. 때문에 독자들의 심문조사를 하기로 했다. 신문에 세번 심문조사장을 게재하고 카자흐국립대 한국어 학과 학생들이 알마티 전화안내서를 이용하면서 우연한 선택 원칙에 따라 조사를 했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앙케이트 총 수 (112장)를 100%로 잡았다. 자료를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지표로 보아 게재하는 것이다. <고려일보>를 구독하십니까?>라는 질문에 19명만이 <구독한다>는 답을 썼다. 그리고 전화로 질문한 자들중에서는 3분의 1만이 신문을 받아본다고 기록했다.

앙케이트를 작성한 사람들의 3분의 1만이 신문의 내용을 높이 평가했다. 전화로 답을 준 사람들의 4%만이 신문을 높이 평가하였고 다수 즉 66%가 만족하다고 대답을 하였고 거의 3분의 1이 불만족해 하였다. 다음 질문은 <우선 어떤 자료들이 신문에 개재되어야 하는가?>였는데 이 질문에 한 답을 본다면 한인들과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컸고 고려인 디아스포라에 관심을 좀 돌렸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사건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고려일보>사에 준 독자들의 제안과 충고, 지적사항들 중에는 <인쇄술이 낮음>, <기자들의 자격수준이 낮음>, <다른 원천에서 얻은 자료들이 있음>, <세계의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정보를 더 알고 싶습니다>, <러문판 면을 더 늘일것>, <한 장씩 넘기는 달력을 보내주십시오>, <고려인 전문가들의 취직에 대한> 표제를 실을것, <재능있는 젊은 고려인들을 독자들에게 더 많이 소개할것>, <21세기 리더> 텔레콩쿨에 고려인이 한 명도 없는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건전한 생활양식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실을것, <현대 수준에 적합할것>, <젊은이들을 더 이끌어 들일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과를 기원합니다>라는 답이였다.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건국대(서울) 중앙아시아 연구센터 소장,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