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적 운명은 고려사람들과 다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남부 지방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많은 면에서 소련 고려인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할린 한인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그리고 러시아에 사는 <큰 땅의 고려인>간의 거리와 지리학적 및 사회-문화적 차이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섬에 사는 한인>의 과거와 현재는 소련 사료편찬에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직 1990년대 초에 첫 자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 우선 박수호 교수의 책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당 간부 출신인 쿠진 아나톨리티모페에비치의 글들이 러시아어로 발행되었는데, 그는 후에 역사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할린 국립대 박승희 교수의 논문들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재능 있고 목적지향적인 젊은 학자이며 역사학 박사과정에 있는 사할린 주의 국가기록원 직원인 진 율리야 이바노브나가 위에 제시된 학자들이 하던 연구사업을 계속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와 생애에 관한 새로운 페이지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 귀국, 모국에서 새로운 생활 환경에서의 적응 문제, 한국영주권 취득 등은 급속도로 발전한 한국으로 귀국하는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이주민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소련 정권은 사할린 남부에 남아 있던 한인들을 일본 국민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종전 후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민사관리국의 자료에 의하면 전쟁이 끝날 무렵에 사할린의 남부와 쿠릴 열도에 약 39만 명의 일본국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949년에 이르러 남부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거주하던 일본국민들은 

거의 다 귀국했습니다.

1956년에 소련-일본 국교회복 공동선언이후 소련 국민이 아닌 채로 소련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과 그의 한인가족들이 귀국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었습니다. 1958년 5-6월에 나호드카 주 북한 총영사관의 요청에 따라 사할린 주 기관들은 노동계약이 끝난 후에 북한으로 귀국하지 않은 한인들과 그리고 이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북한의 국적을 회복하거나 받게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나호드카 시에 있는 북한 총영사관에 오직 207건의 신청서가 들어 왔는데 그중 117건은 무국적자였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다 북한 국적을 받았습니다. 1957-1960년 기간에 2,294명이 사할린으로부터 귀국했습니다. 소련국적이나 북한 국적을 받은 사람들은 귀국하지 못하였습니다. 

1957-1959년에 있은 귀국과정에서 사할린에 남은 일본인들과 그들의 가족으로 되는 한인 499명을 귀국시켰습니다. 소련 정권은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사할린 한인들의 희망을 제한했습니다. 그 원인은 노동력 부족이 아니라, 주 원인은 주로 정치적 및 사상적 면에 있었습니다. 

일본 귀국은 사할린 한인들이 새 사회주의 조국보다 저들의 이전 식민지국을 더 원한다는 것을 확증하여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 국적이나 북한 국적을 가진 한인들은 법적으로 일본으로 귀국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1970년부터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사할린 한인들은 사실상 일본이나 한국을 갈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 시기에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일본과 한국에서 거주하는 친척들과의 상봉>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에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으로부터 사할린 한인 120명을 태운 <보잉 727>형 여객기가 한국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친척을 만나기 위해 간 것입니다. 1990년 5월에는 사할린 이산가족에 대한 도움을 확대할 목적으로 한국과 일본 국회의원들이 유즈노-사할린스크를 방문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 사할린 한인 집단이 역사적 조국인 한국으로 가기 위해 직항을 이용했습니다. 1991년 4월 26일에 소련 내각은 외국국민들이 소련에 체류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법령을 승인했는데, 그것은 바로 비국적자에게도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할린 주 내무국의 자료에 의하면 1981-1987년 기간에 사할린 한인들에게 일본을 개인방문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가 177건이 들어왔는데 그 중 128명은 소련 국적자였습니다. 소련과 한국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다방면으로 관계가 발전됨에 따라 1990년대 상반기에 사할린 한인 1세를 모국으로 귀국시키려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게다가 이 문제를 일본과 한국의 공식적인 계층, 기자와 학자, 그리고 연로한 사할린 한인들이 직접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국에는 많은 비용이 요구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사람들을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국자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해야 했으며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고 연금 및 보조금 지불을 보장하고 의료도 제공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모스크바, 동경과 서울간 회담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복잡했습니다. 결국 3자협정에 따라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 귀국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귀환하는 것과 동시에 1946-1949년도 조약에 따라 북한에서 사할린 주로 온 북한 사람들을 북한으로 귀환시키는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59-1961년도 기간에 5,096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그 중에서 3,066명이 성인이고 2,030명이 아이들이었습니다. 1962년에 500명의 마지막 한인 집단이 사할린에서 북한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에는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국가적 장애나 행정적 금지 조치 때문이 아니라 다수 한인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표명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1992년에 러시아, 한국, 일본 대표들은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 1세를 모국으로 귀환시킬 계획을 토의했습니다. 3자위원회의 장기 회담 끝에 이 계획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일본이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할린 한인들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행 첫 귀환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울, 안산, 인천, 오산, 김포, 파주, 천안, 김해, 화성 등 도시들로 이주되었습니다. 

1997년에 사할린에서 한국으로 첫 이주민들이 떠났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정권이 카라후토 (남부 사할린)에서 지불하지 않은 봉급의 보상금으로 인천에 100명 수용의 양로원 건설과 장비 그리고 안산에 500세대의 주택 건설에 필요한 자금 30억엔 이상을 지원했습니다. 이 주택지역을 <고향마을>이라고 칭합니다. 아파트의 키를 부부에게 내 주면서 쌀, 김치, 미역, 설탕, 양념이 포함된 식품 세트도 지급되었습니다. 아파트에는 일련의 가구와 가전제품이 있었고 이불과 청소도구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제공되었습니다. 

아파트 월세는 10-15만원이고 일반관리비는 계절에 따라 5만원에서 10만원에 이릅니다. 매월 보조금을 1인당 75,000원을 지급합니다. 부부 연금이 약 70만원인데 필요한 비용을 다 지불한 후에는 약 60만원이 남습니다. 이 금액을 절약하면 생활이 충분하며 이와 더불어 교회, 지방 기업가들, 자선단체, 비정부 기관들이 도움을 줍니다. 보상금에서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사할린 왕복항공료가 지급됩니다.

비교적 편안한 생활조건, 질 좋은 의료지원, 내일에 대한 확신은 사할린 1세 4,200여명이 모국으로 귀환한 원인으로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의 19개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귀환한 사할린 한인들은 새로운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한국어의 현대 표준어를 모르는 것이 첫 문제입니다. 이 원인 그리고 객관적 성격을 띤 일부 원인에 의해 사할린 한인들이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주류 계층에 들어가기 어렵거나 실제로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들이 고용 노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일정한 노임을 받는 것은 연금을 받을 권리를 잃거나 보조금을 낮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아픈 문제는 친척들과 떨어져 살게 되는 것이며, 사할린에 남은 자식들과 손자들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향수와 애수는 바로 이 점과 관계가 됩니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거주한 지 5년이 되면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국적을 바꿀 결심을 합니다. 

감수 이재완

번역 남경자

김 게르만 : 역사학 박사, 교수, 건국대(서울) 중앙아시아 연구센터 소장,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 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