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시르다리야강을  품은 카자흐스탄 서남부의 투란저지에 위치한 크슬오르다시는  1923년- 25년 카자흐자치공화국 수도였었지만 기후나 지리학적으로  불리하여  수도를 알마아타로 이전 시킨 뒤 시골의 몰골을  벗지 못한 채 사람들은  낮으막한 토벽집 신세를 면치 못했고 아파트건물은  몇 채 되지 않았다.

(지난호의 계속)

머리는 쉰 우유로 감고 빨래는 양재물을  보태라고 알려줘서 점차 적응 돼 갔다.

한번은 독자 모집  차 변두리에 나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 함께 간 여사진기사를 따라  큰 면적을 차지하는 흙언덕으로 올라갔더니    어찌된 일인지 연기굴뚝만 발길에 채였다.   사진기자가  나더러 굴뚝 차지 말라고 경고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고려인마을 지붕이라면서.  놀라서 내려가려고 급히 돌아서는 나를 불러세우며 사진기자는  덛부쳤다   

 “무스게 놀라니? .  멫십년  댕겨도  아이 무너진다” 그녀의 짙은 함경도 사투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땅속에서 삽니까?”

 “아이다. 들어가 봄 안다.”

 이곳 태생인 30대 여 사진기자는   언덕아래로 내려가더니  쉽게 골목입구를 찾았다.  위에서 볼 땐 언덕처럼 보이던 곳이 바로 고려인들이 사는  집들이 빙 둘러 앉은 지붕이였다. 한 사람  겨우 들어 갈 만한 골목은 처음 온 나에게는 완전 미로였다.  몇 세대가 사는지 다닥다닥 연달아  나 있는 문은 여러 가정이 살고 있음을 말했다. 한데 방안에 들어서면 딴 세상에 온 듯이 깨끗이 잘  꾸려젔고 한 낮 밖은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무더운데 집안(땅굴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너무 잘 꾸려져 있었다)은 선선하고  좋았다. 흠이라면 어떤 집에는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불을 켜고 살았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농번기에 멀리 우크라이나 쪽에 나가서  계절 농사를 하고 겨울에야 돌아오는 농사군들 이여서 우리가 찾아 갔을 때는  안주인이나 재학중인 청소년, 직장을 다니는 젊은이  몇몇 뿐 이였다. 본격적인 독자모집은 농군들이 돌아오는 늦은 가을에 하지만   빠진 가정만 체크하는 중 이였다. 

신문사로 돌아오는 길에 사진기자에게 처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들은 전에 원동 연해주에 살았는데  37년에 여기로 이사하였다고.  지금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 황야에 땅굴을 파고 살다가 십년전부터 자식 공부를 시키려고 시가지로  왔지만  살 집이 없어  저렇게  토벽집을 지었는데  벽을 서로 붙이는 식으로 짓다 보니  지붕에 흙을 얹을 때도 가지런히 올려 한 개의 큰집이  되였다 한다 . 그런데 한번 끝에 있던 집이 무너져 그곳을 방치해두었더니 겨울에 아이들이 거기에 미끄럼대를 만들어버리고 주인 가족은 이웃의 도움으로  토벽집 중간에 새 방을 꾸렸더니  밖으로 나는 벽이  막혀 집에 유리창이 없다고 했다. 사진기자는 자신도 여기는 아니지만 다른 곳 똑 같은 토굴에 살면서  어릴 적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농군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는  대학 출신, 교사, 기술자 들이 있는데 목돈이 있어야 집을 살 수 있으니 농사를 시작했다. 월급으로 집을 장만할 수  없으니 토벽집 신세를 벗어나려면  가을에 농산물을 팔아 목돈을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해마다 농사가 잘되지도 않고 어떤 해는  풍년이 들어도 제대로 팔지 못하여 겨우 겨울 날 돈만 들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돈을 벌어 시내에 제대로 된 집을 사 이곳을  떠난 가족이 벌써 여럿이라고 했다.

“연해주 조건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이런데로 이사왔습니까?”  

“그 따위 묻지 마라. 몰라도 된다.”

사진기자는 내 질문을 단번에 일축해 버렸다.   

사할린 조선인들도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판자 집에 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흙에 짚을 이겨 만든 토벽 집에 사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사할린은 삼림에 가면 건자재용 나무를 장만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크슬오르다는 사방이 허허벌판, 보이는건  이리저리 꼬이고 구부러진 줄기에 앙상한 가시를 가로 세운 사막의 싹사울나무 뿐이니 벼 짚을  흙에 버무려 벽에 바르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이곳은 일년 내 강수량이 미세하여 여느 곳처럼 지붕을 삼각형으로 하지 않고 반듯하게 해도 문제가 없었다. 처음에 나는 그런 집들을 보고 지붕이 없는 집이라고 의아해 한적도 있었다. 대륙성기후의 겨울은 눈이 드믈게 내리지만  북쪽에서 밀려오는 찬바람이 카자흐스탄 황야를 사정 없이 휩쓸 때는  일직선  지붕에 얹어놓은 톨이 (타르지) 날아갈가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크슬오르다  “레닌기치”신문사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신부름도 하고 자료번역도 하면서 짧은 2개월이였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레닌기치 사는 60여명의 사원들이  주 6호를 발간하는  고려인이 있는 곳이면 소련전역에서 받아보는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였다.  나는 문예부 연수생으로 입사하여 먼저 김기철선생님의  학교 수업 같은 강의를  한 달간  매일  들었다. 짬짬이 주필선생님이 호출하여  신문학부 입시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여러가지 상식이 담긴 책자들을 주고 며칠 뒤에는 세세히 면담 형 점검을 하셨다. 

덕분에  입시 준비는 완전히 끝낼 수 있었지만  공화국 수도 알마타에 가야 하는데  신문사 추천에도 여행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입시가 임박하여 송진파 주필의 충고로 허가 없이 떠났다. 경찰에서 혹시 날 잡으러 오지 않나 걱정을 하면서도 입학시험을 꽤 잘 치렀다. 합격되면 나중에라도 경찰허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한 가닥 희망은 품고.그러나 웬걸,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학부장 비서가  내무부 호출장을 내밀며 당장 가보라고 했다.      

내무부 외국인 담당 부장은  내 말은  들으려고도 않고   24시간  이내에 알마아타를 떠나라고 하면서  만약 학교에 합격하면 크슬오르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조치해주겠으니 알마아타는 다시 올 필요가 없다고 경고했다.  학생신분임을 참고하여  엄벌은 내리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역시 나는 이방인이였다. 소련에서 출생하여 이곳 교육을 받았지만 외국에도 나가지 못하고 마음대로 학교와 직장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 나라 국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방인.   

“차비가 없어  당장은 못 떠납니다”  나는 시간을 끌어보려는 심산에   이런 핑계를 댔다.

“차비가 없으면 걸어가…”  서류를 뒤적이면서 그는 머리도 들지 않고 냉철하게 잘라버렸다.

그 어떤 이유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 태도였다.

함께 시험을 준비하며 한 방에서 지내던  입시생들과 인사도 못하고 쪽지만 남겨두고 떠났다. 27시간 만에  크슬오르다에  도착했다.  내무부는 크슬오르다사범대학교 러문학부에서  공부할수 있게 조치하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정착하여 안전기에 들어섰을 때 사할린 조선인은 아직도 불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인의 아리랑 고개

크슬오르다에서  4년은 나에게  차후 내 삶의 가장 큰 디딤돌을 만들어준  자아와 교훈의 연속이였다.  소련에서 고려인의 위치를  알게 되고  모든 분야에서 아무리 뛰여난 업적을 올려도  오르지 못할  한계가 있으며, 그에 의한 고려인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이 존재함은 엄연한 현실임을 보았다.  

이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