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시외에 있는 친구내 집으로 갔었다. 집이 좀 떨어져 있었기에 오솔길을 따라 풀밭을 잠간 걸어야 하였다. 오솔길에 들어서자 마자 방금 벤 풀냄새가 코를 푹 찔렀다. 어릴적부터 잘 알고 있는 그 풀냄새였다…

나의 아동시절은 사할린의 니꼴라옙까 촌 (돌린쓰크구역)에서 흘러갔다. 니꼴라옙까 촌은 낮은 산기슭 아래에 놓였었는데 앞에는 작은 강이 흘렀다. 때문에 여름이면 그 강에서 수영도 하고 물장난도 쳤다. 농촌의 남녀 아이들은 함께 숨바꼭질도 하고 랍따(공을 치면서 노는유희도 놀며 낚시질도 하면서 화목하게 지냈다. 더군다나 농촌의 중심에 있는 한 학교에서 모두가 공부하였기에 그랬을 것이다.내가 처음에 ㅣ학년에 입학했을 때는 교원이 두명 밖에 없었다– 교장선생은 유대성이고 담임선생은 김장호였다. 그 분들은 아주 유식한 선생들이었다. 나는 일생을 기자생활을 하면서 한글을 잘 배워준 첫 선생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품고 있다.

처음에는 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배워줄 선생도 없었고) 대륙에서 러시아어 교원이 사할린으로 오기 시작해서부터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마 내가 3학년 때였을 것이다. 2학년을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했을 때 책가방을 선물로 받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 그 시기에 책가방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우리는 헝겊에 공책과 책을 싸들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니 까만 책가방을 받은 나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 하나만이 아니라 몇몇 학생이 가방을 받았다. 가방을 받은 우리는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모인 교실에서 동서남북을 보고 차례로 돌아서며 (선생이 시키는대로)가벼운 절을 하였다…

쏘련군대에 의해 남부사할린이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8년밖에 아직 되지 않았으니 부락에는 조선사람들만 살고 있었다. 부모들의 기본 직업이 벌목공이었다. 언젠가 일제에 끌려 사할린에 와서 강제로동을 하다가 해방후에 고향으로 가지 못한 (쏘련과 한국간에 외교관계가 없었기에) 조선인들이 벌목소에서 일했는데 그들 다수가 홀몸이였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며 살다가 결국 부모형제 보지 못하고 억울하게도 사할린 땅에 묻히게 되었다.이 목재소를 <뻬레왈>(고개길) 이라고 칭했는데 50년대에 전 싸할린 주에서명성을 떨쳤다. 소인예술단 단장 안명복은 지어 노래까지 지어 예술단원들이 그 노래를 불렀다:

<뻬레왈>목재소 명성이 높아

류송물 구비구비 어디로 흐르느냐

에해요, 대해요, 저 멀리 벌목공의 톱질소리

스르릉, 스르릉, 스르릉, 스르릉 들려온다

에해요, 대해요 좋은 것은 벌목일세…

<뻬레왈>목재소를 김덕문회장이 지도하였다. 능숙한 지도자의 수완을 가지고 있는 김 회장은 벌목지부마다에서 작업을 빈틈없이 조직하여 월마다 계획을 초과수행하였다. 그는 쏘련 최고쏘베트 상임위원회의 영예표창장을 받은 사할린의 첫 조선 사람이다. 영예표창장을 받은 날에 김덕문이네 집에서 연회를 차려 온 부락 사람들이 즐겁게 놀던 일이 나의 기억에 남았다.

그 시기에 나의 향촌 주민들의 집집마다에 또 기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해방후에 비공민증 (무국적)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하여 차츰차츰 쏘련공민증을 수속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받았으니 쏘련공민증을 받은 집에서는 그 날 상다라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재미있게 놀았다. 정권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인이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집집마다에서 상을 차렸다. 지금같으면 공민증을 받는 것이 보통 일인데 60여년 전에는 왜 그랬을까? 아마 일제의 억압하에 고된 노동을 하면서 자기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 하나 없던 무권리한 조선인들이 해방후에 한 나라의 떳떳한 공민이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서 그랬다고 생각된다.

원래 해방후에 모든 면에서 우리 농촌 주민들의 열심이 대단했던 것을 어렸던 우리들이 직접 보았다. 여성들은 낮에는 농사나 풀베기에 나서고 저녁에는 야간학교 (다수가 무식했으니)를 다녔으며 수업이 없는 날에는 소인예술단에서 노래와 춤을 배우고 연극도 구락부 무대에 올렸다.그러면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우리는 겨울에 썰매타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당시 드물었던 썰매가 그 누구집에 나타나면 나머지 아이들이 다 그 집 아이가 끌고 나온 썰매에 타려고 서로 앞을 다툰다.  결국 썰매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산에서 좀 미끌어 내려가다가 뒤집히고 만다. 그러면 눈투성이가 된 우리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농촌의 정적을 깨뜨린다…

니꼴라옙까 촌 주위에는 봄, 여름에 나물과 열매들이 많았다. 늦봄에는 들에 나가 아이누냉이 (일본말인데 아이누족이 먹는 파를 의미함, 러시아어로는 체렘샤)를 캐다가 디쳐서 나물을 만들어 먹군 하였다. 또 미나리를 뜯어서 나물을 만들거나 미나리 김치를 담구었다. 여름에는 체르니까와 골루비까를 따러 산으로 간다. 동네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갈때면 나도 엄마와 같이 다녔다. 대나무가 많은 그 산들에 곰이 있을 수 있으니 우리는 멀리서부터 양철통을 두드린다. 곰이 스스로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곳에는 낮으막한 체르니까 관목에 달린 열매가 훑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곰이 훑어먹은 것이다. 그 외에도 혈압에 좋다는 클로뽑까, 모로스까도 뜯어 먹을 수 있고 앞산에는 산딸기가 가득하다. 우리는 반까 (유리 통)를 끈으로 매어 목에 걸고 딸기를 딴다. 산딸기는 다른 딸기와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향내를 뿜었다. 송어의 산란기에는 문자 그대로 반찬이 없으면 윌라 (갈퀴)를 가지고 강에 나가 찍으면 된다. 그러면 반찬거리가 잡힌다. 지어는 우리 여자아이들도 그렇게 잡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니꼴라옙까에서 살면서 우리는 쏘련의 발전단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전력공급을 실례로 들 수 있었다. 처음에 즉 50년대초기에 우리는 밤에 석유등을 켰다. 날마다 불에 그을린 유리등을 닦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아버지는 내가 닦은후에 꼭 검열하였다. 진짜 실증이 났다. 다음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력을 촌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새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밤 10시까지였다. 10시 15분전에 세번 불이 깜박였는데 이것은 곧 전기가 꺼진다는 경고였다. 우리는 친구집에 가 있다가도 전등이 깜박이기 시작하면 제각기 집으로 달려갔다. 2-3년후에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50년대 말에 목재소를 아이쓰크라는 새 곳으로 옮겼다. 내가 생각건대 니꼴라옙까 부근에서 벌목을 다 끝냈기에 자리를 옮긴 것 같다. 그 때 그 촌에 살던 가정들이 다 아이쓰크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사정에 따라 다른 곳으로도 갔기에 아동시절의 친구들도 다 흩어졌다. 그후 나는 사할린주 소재지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여러해 살았는데 니꼴라옙까촌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 몇몇이 역시 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행사에서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니꼴라옙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몇십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니꼴라옙까가 어떻게 되였을까?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누구의 말을 들을라니 우리가 살던 곳에 지금 곰이 다닌다더라, 아마 집들도 다 무너지고 풀밭이 된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실로 그 곳을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모두가 가보고 싶었지만 제각기 가정이 있으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년후에 내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오니 향촌과의 거리는 더욱 더 멀어졌다. 향촌을 가 보려는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먼 사할린의 정든 향촌을 나는 꿈에 본다. 여전히 우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겨울에 눈싸움도 하고 여름에는 수영도 하며 학교마당에 세워진 그네를 타는 우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남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