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국제한식조리학교(CCIK)가 카자흐스탄 국립알마티공업대학교(ATU)와 공동연구소 및 공동학과 설립, 한식조리연수와 관련해 지난 24일 협약(MOU)을 채결했다.

지난 8월 27일 벨라루스의 민쓰크시에서 국제 태권도 경기 (lTF)가 끝났다. 세계 56개국에서 온 천여명의 참가자들이 상기국제경고 경기에서 힘을 다루었다. 14세부터 40세까지의 년령의 카자흐스탄 태권도 명수들도 참가했다. 48명의 카자흐스탄 선수들이 카자흐스탄의 명예를 고수하였는데 그들은 5개의 금메달, 18개의 동메달을 따서 팀별로 일곱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 강 스웨틀라나, 라시드 마메도브, 누를란 키르기스바예브, 로만 푸, 막씸 일리야쏘브가 금메달을 쟁취했다. 강 스웨틀라나는 스포츠맨-원로들 사이에서 출전하면서 금메달 하나와 동메달 둘을 땄다. 우리는 금방 비행기에서 내린 강 스웨틀라나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유명한 태권도 선수는 나라의 자랑이며 카자흐스탄에서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자랑으로 되여 있다. 모국 멀리에서 살고 있는 스웨틀라는 이 승리와 세계선수권 대회에의 참가를 한반도 통일업적 그리고 얼마전에 비극적으로 참사한 유명한 피겨스케이팅 선수 정 제니스에게 드렸다. 원로스포츠 선수들 모두가 스웨틀라나를 받들었다. 

태권도 도장에서 항상 확고한 성과와 안정한 결과를 고수하는 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서 감탄을 그칠 수 없다. 스웨틀라나 선수에게는 경기에서 이미 달성한 성과만 해도 충분해서 이를 테면 이제는 젊은 스포츠맨들의 성과에 기뻐하면서 편안히 쉴 때다. 생각해 보십시오. 강 스웨틀라나는 비즈니스에 몸담고 있으며 두 자녀 (아들과 딸)를 키우는 훌륭한 엄마이다.사회적 공인에 대해 말한다면 이 면에서도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중앙아시아 남성과 여성 선수들 중에서 WTF (World Taekwon-do Federation, 한국태권도 학교) 태권도의 유일한 7단 소유자이며 lTF 태권도의 5단 소유자이다. 태권도가 카자흐스탄에서 첫 걸음을 내 디디기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가 18세였는데 스웨틀라나는 그 때 카자흐스탄에서 검은 띠를 소유한 첫 여성으로 되었다. 그런데 44세에 그는 이 스포츠 종목에서 원로스포츠맨들 사이에서 아시아 절대쳄피온이 되어 높은 스포츠 지위를 또다시 확증하였다.그 외에 강 스웨틀라나는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한반도 민주평통자문회 중앙아시아 협의회 성원에 들어있다. 스웨틀라나 올레고브나는 울란-바또르에서 세번 명예시상대에 오르면서 카자흐스탄의 국기와 통일된 한반도의 통일을 상징하는 기를 올렸다. 그는 건전한 생활양식을 보급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 즉 태권도-로비카를 강구했는데 이것은 율동춤과 태권도 요소들을 혼합한 것이다. 그의 무진장한 열의, 태권도라는 말만 나와도 눈이 반짝이는 이 여성과 시간이 가는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웨틀라나가 자신의 스포츠 성과를  위해, 가정을 위해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업을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스웨틀라나 올레고브나, 이상에 지적한 많은 성과와 기타 성과에서 세계 태권도경기에서달성한 이번 성과만이 부족했던가요?

-예, 그래요. 지어 저의 스포츠 출세를 끝내기 위해서도 나 자신에게 금메달이 부족했습니다. 수년을 스포츠에 이바지하고 스포츠에서 최고 성과로 되는 목적을 자기앞에 세운 임의의 스포츠선수가 이 스포츠 야망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금메달보다 더 어렵게 딴 동메달은 팀전반에 필요한 것이였습니다.

-실지에 있어 좀 이상한데요, 금메달을 땄다고 모두가 스웨틀라나를 축하하는데 동메달을 또 두개 땄다는 말은 언론에 그 어디에도 없었거던요…

-이번 선수권대회가 저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였습니다. 하긴 실지에 있어 모든 것이 다 제게있는듯 한데요. 친척들도 이번 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비즈니스에도 자리를 오래 비워 (9개월동안 연습을 하였다)두었거던요. 일부 동료들은 저더러 <나이가 들어서 그것이 네게 무슨 필요가 있어?>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지신에게 필요한 것이였지요. 내가 이번에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다음 선수권대회에 준비하여 결국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입니다. 스포츠선수마다가 자기의 생활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달성하려고 하고요 실현되지 않은 꿈이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사랑했고 큰 승리에 대해 꿈을 꾸었어요. 저의 스포츠생활에서 선수권대회가 세번 있었습니다: 1992년에는 아마 경험이 아직도 적었던 모양입니다. 1994년에는 태여난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애를 두고 선수권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때는 육체적으로 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던가봐요. 그런데 오늘은 저에게 다 있거던요,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좀 부족한 점도 있겠지요…나는 속도를 념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과 꼭 승리하겠다는 뜨거운 열의는 남았지 않습니까! 동료들과 트레이너들이 저의 기술이 변하지 않았으며 어떤 요소는 전보다 더 늘었다고 하였는데 그런 찬사를 듣기가 기뻤습니다. 육체적 단련에 대해 말한다면 (뜻밖에)저보다 나이가 어린 선수들보다 강했습니다. 원로-선수들의 경기는 소소한 부분까지 모든 조건이 나이를 고려하여 조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베이지에는 선수의 성명, 40세 2개월이라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몸무게에 대해 말한다면 엄격히 통제했는데 100그람이라도 초과하면경기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경기에 준비하면서 무게를 최소한 줄여서 경기를 앞둔 몸무게가 일생에서 첫 세계 선수권대회에 참가했을 때의 무게와 같았습니다. 

-임의의 선수가 스타드를 앞두고 몹시 흥분되며 그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태권도도장에 나가기전에 경쟁자들 사이에 심리적 투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트레이너도 곁에 없는 스웨틀라는 이 부담을 어떻게 더는지요?

-기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선수들이 훈련할 때는 서로 사귀면서 가깝게 지내는데 경기중에는 친구들을 잃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승리를 기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일부 선수들을 트레이너들이 안심시키며 그 누구는 통화하며 일부는 따로 떨어져서 태권도도장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태권도복을 입고나서이어포늘 끼고 음악을 들었는데 보통 <아리랑>곡을 듣거던요. 그런데 이 장중하고 안온한 곡은 항상 저를 고무시킵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 출전하는 것이 저를 받들었습니다. 나는 미리 한국에서 한복을 주문하여 그것을 개막식에 입었습니다. 제가 고려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떤 선수들은 <카자흐스탄에서 오시지 않았나요?>라고 의문하는 것입니다.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해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선수들에게는 태권도가 카자흐스탄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스웨틀라나 올레고브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준비가 되여 있었습니까? 

-모든 준비가 다 되여 있었습니다! 나는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고 오직 스포츠에 필요한 것만 했습니다. 음식에 대해 말한다면 스포츠맨의 신체에 유익한 것만 먹었지요. 훈련은 날마다 했구요, 경기를 앞두고는 하루에 세번씩 했습니다. 모든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저의 훈련에 지장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생활양식에로 넘어갔으며 거의 일년동안 완강히 승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동안에 몸무게도 많이 잃었어요. 처음에는 내가 고의적으로 식이요법을 준수했습니다. 40세된 여성들이 50키로그람 몸무게를 유지하기가 힘들 것이며 저의 무게급의 경쟁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리 말하는바 바로 저의 급수의 선수들이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많이 왔습니다. 그리고 민스크에 온후 걱정하는 바람에 또 몇 키로 줄었지요. 그런데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였지요, 몸무게와 함께 힘을 잃으니까요.

-그런데 스웨틀라나는 이런 <소소한> 것이 주목을 돌리지 않고 금메달을 따노라고 온갖 힘을 다 들인후 또 동메달을 따기 위해 출전한 것이지요?

-이에 앞서 내가 팔에 타박상을 입어 팔이 부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팀에 속하는 청소년들보다 내가 메달을 받을 가능성이 더 있다고 생각하고 널판지를 부술 때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부은 것을 마취시켜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나는 나의 경쟁자곳인 오스트랄리아 선수가 부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메달의 운명을 결정하는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힘차게 뛰여 널판지를 조각냈습니다. 동메달이 나의 것, 우리의 것이였습니다.

-스웨틀라나 올레고브나, 그런데 만약 의사가 스웨틀라나의 건강을 리스크하지 않으려고 출전을 허가하지 않았더라면…

-물론 의사가 허가하지 않았지요, 그런 책임을 누가 지려고 하겠습니까. 아픔을 느끼지 않으니까 팔을 불룰 수도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내가 타박상을 입었더라도 메달을 따려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스웨틀라나를 축하했던가요?

-친구가 축하했어요. 경기장내에서는 CIS 나라들에서 온 선수들이 다 축하하고 러시아에서 온 나의 친구들도 축하했습니다. 이미 10여년을 알고 지내는 타지키스탄의 태권도협회장 야히야예브가 저를 따뜻이 축하했어요. 그리고 물론 자지 않고 생방송을 걸쳐 경기를 보던 친구들이 축하했어요. 나는 그 애들에게 절대 전화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내가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식들이 축하했지요. 딸애는 <엄마, 자랑해! 그리고 우리 반 학생들도 엄마를 자랑하고 있어요>라고 전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축하를 받고 있습니다.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서 반갑습니다.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런 승리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원들도 충심으로 축하합니다.우리 신문사가 항상 스웨틀라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래서 스웨틀라나의 성과를 즉시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스포츠에서 앞으로도 승리 그리고 다방면적 활동에서 성과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진 따마라  

 

키르기스스탄의 이싁꿀주 박뚜우-돌로노뚜 촌 부근의 경마장에서 제 3차 유목민 스포츠경기 개막식이 있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대통령 누르쑬딴 나사르바예브가 개막식에 참가했다.

카자흐스탄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소오론바이 제엔베꼬브의 초청을 받아 촐빤-아따시에서 진행된 제 3차 국제 유목민 스포츠경기의 성대한 개막식에 참가하였다.제 3차 국제 유목민 스포츠경기에 한국 스포츠맨들과 문화활동가들이 참가한다고 한국주재 키르기스스탄 대사관이 보도하였다. 한국 스포츠선수 (팔씨름) 3명과 전통적인 민족 씨름에 참가하는 선수 8명이 왔다. 그리고 민족국악단 배우 9명이 문화행사에 참가하였다. 한국 국제 A 방송이 상기 행사를 방송하였다.2018년도 유목민 경기에서 메달 수로 보아 카자흐스탄 팀이 첫 자리를 차지했다. 카자흐스탄 선수들은 금메달 7개, 은메달 7개와 동메달 3개를 땄다. 키그기스스탄 팀이 15개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동메달 7개)의 메달을 따서 둘째 자리, 뚜르크메니스탄 팀이 셋째 자리를 차지했다.     

 

1991년   8월  22일에   설립한   알마티종합한국교육원은조용할 새가 없이 항상 학생들로 흥성거린다. 1-2학기  수업이 있었을   때는  수강생들로 복잡했고 또 여러 가지  청소년  콩쿨(경쟁)도  있고 그리고 한국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카자흐스탄을  찾아 온다.

7월말에 모스크바에서 제 1차 고려인 국제포럼 <OKFriends Re-Union CIS>가 진행되었다. 이 포럼에 카자흐스탄청년운동 열성자들, 꼬쓰따나이시 사물놀이 음악가들이 참가했다.

눈은 사람에게 있어서 고귀한 보물이니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우리가 어릴적부터 듣게 된다. 그런데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우리 세기에 이것이 날이 갈수록 복잡해 진다. 그것은 다수 사람들이 모니터, 스미트폰 기타 전자 장치 문자 그대로 달라붙어있기 때문이다. 알마티시 <Zere>의료 센터 책임의사인 안과의사 윤 올리가 레오니도브나가 눈을 어떻게 소중히 보존할데 대해, 현대식 치료 방법에 대해 그리고 눈에 유리한 생활양식과 식사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우리는 의료일군절 전야에 올리가 레오니도브나와 만났기에 직업적 명절과 관련하여 그를 축하하였다.일부 사람들은 의사의 직업에 대해 아동시절때부터 꿈꾸며 다른 일부는 그 직업을 우연히 선택하게 된다. <Zere> 의료센터 책임의사 윤 올리가는 어렸을 때에 의사가 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이 우연히 의학과 인연을 맺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의사의 직업이 그의 전 생의 업적으로 되었다.사람들이 세상을 더 선명하게, 더 확실히 보도록 도와주는 것을 올리가는 자기의 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환자들에 대한 주의깊은 태도와 동정심이 이미 15년동안 이 과업을 성과적으로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