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화가에 대해 연구를 하기 로 결심했을 무렵(2017.04경) 처음으로 알게 된 화가가 문빅토르이다. 그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전시를 열었던 작가이다. 2017년 9월경에 국회의사당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아픈 기억 꿈꾸는 희망’의 개인전을 개최했을 때 잠시 뵈었던 인연이 있다. 그 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이번 카자흐스탄에 처음 갖게 되었다. 그의 친절함으로, 알마티에서 토막토막 이동 시간을 활용하여 세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1951년 카자흐스탄의 남동부 도시인 우슈토베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사용하시던 할머니와 홀어머니(박 시나이) 사이에서 자랐기에, 한국어를 곧 잘 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11살 때 그곳으로 강제이주를 왔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찍 헤어지셔서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뿌리인 ‘문평 문씨(文平文氏)’에 대해 알고 싶은 갈증을 느껴, 여러 차례 문씨의 본 고장인 광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어렸을 적 그의 집이 너무나도 가난하였기에, 그림을 통해서나마 세상을 미화하고 싶어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지난주 한반도가 세계 뉴스의 중심처가 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은 그 회담이 꼭 진행되리라는 예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38선 이남과 이북에 조성되어 있던 긴박한 사정과 원인으로 인하여 상기 회담의 불가피성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가 회담 준비과정과 출판물 등 언론의 보도에서 예상되었기에 기대 이상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긴 회담의 역사적 의의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가 다음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이 있을 것이고 다음 한국, 중국, 일본의 국가정상들의 회담이 진행될 것이며 결국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날 것입니다. 

금년 5월에 한민족 축제 대 명절행사가 진행된다. 북한과 남한, 일본, 러시아, 우스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기타 나라들에서 손님들이 올 것이다. 행사를 앞두고 모스크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김 철호참사관이 한국관을 방문했다. 김참사관의 기분을 보니 북한대표들도 축제에 참가하게 된다는 소식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동포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18년 4월 28일 아스타나의 평화 및 화합 궁전에서 카자흐스탄공화국 대통령 누르쑬딴 아비세위츠 나사르바예브의 사회하에 카자흐스탄민족회의 제 26치 회의가 진행되었다. <5개의 사회적 발기 – 사회의 사회적 통일 강령>이 회의의 의정으로 되었다.

국경 수비병은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첫째로  이는  국가의  초소에서   국가 경계를 철저히  옹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건전한  정신에  육체적으로 단련되고 강한 성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국경 수비전문학교는 신입생들의  선발에 특별한 주목을 돌리고 있다.군무교육과  인연을   맺은  현재 예비군  장교인  육군 중령 김 예브게니 표도로비츠는   연금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교편을  잡고  군무를  계속하고  있다.   군사학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군무활동을  계속하는   김 예브게니  표도로비츠   장교를  135  중학교에서 만났다.  젊었을  때  나라에  바친  군사 공로로 하여  수여 받은  여러   훈장과  메달들이  그의  가슴을   빛내고  있었다.   그  공로를  살펴보면  평민들과는  특별 차이가 없겠지만  이에는 나라를 극히 사랑하는  애국심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어느 날 경진이는 갑자기 심장을 끌어쥐고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에 쓰러젔다.그런데 이것을 본 논나는 구급차를 부르지도 않았고 본체만체했다. 일해서 돈을 벌 생각은 안하고 앓기만 하는것이 논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다못해     논나는 이혼을 선언했다.  논나는 경진이를 버리고 큰 아들 안드레이와 함께  다른 집으로 이주하고 말았다.  둘째 딸과 같이 남은 이경진은 딸이 버는 돈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건강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어떤 때는 심장을 끌어쥐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넘어질 때가 빈번  했는데  어째선지 둘째 딸 역시  자기 어머니처럼 구급차도 부르지 않았고 본체만체 했다.  차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는 약간한  반신불수가 겹치게 되었고  어떤때는 정신이상이 생겨 헛소리를 치기도 했다.  내가 모쓰크와출장을 갔을 때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오래간만에  가장 가까운 동창생 이경진 집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