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큰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우리 카자흐스탄에서  아랄해가 없어진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의 무책임적인 경제적 활동의 결과라는것은그 누구도 부정할수없는 사실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랄해가  차지 하는 바다면적은  차츰  축소되었고 이윽고 완전 사멸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다물이 없어지자  거대한 면적을차지하는 노출된 바다밑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사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사막화됨에 따라 이 지방은  바람이 몹시 부는 기후로  변했고 그와 동시에      어촌들에서는 지금까지 해명되지 못한 병환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비극적현상을 초래했다.  많은 어부들은  실업을 당했고 따라서  자기들의 정든 아랄해 어촌을 버리고  부득불 발하스 호수나 기타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형편이였다. 

해마다 알마티알파라비국립대 동방학부에서 진행되는 말하기 대회는 전국 각 지역들의 대학생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한양대 국제협력부 및 남서울대 국제협력부 처장님들의 노력으로 말하기 대회가  진행되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려인 청소년 오케스트라 ‘아리랑’이 창단됐다. 25일 고려인청소년문화센터에서 창단식을 가진 ‘아리랑’은 단원을 확대 모집해 점차 규모를 키워 나갈 계획이다.고려인 마을(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소재)에 창단된 ‘아리랑’은 현악기 위주의 스트링 오케스트라로 구성됐다. 명칭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노래에서 따왔다. 

전승절 전야에 망기스따우주 고려인 소수민족연합 <조선>열성자들은 다가오는 전승절과 관련하여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로병들과 로동전선 참가자들을 축하하였다.

해마다 위대한 전승절이 가까워 올수록 될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우리의 손우 세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가 어떻게 전쟁을 겪었으며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무엇을 달성했는가를 알았으면 한다. 전쟁시대에 왜 고려인들을 붉은 군대에 동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조국을 수호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하는 질문이 나를 고민에 잠기게 하였다. <건강한 사나이가 왜 전선에 나가지 않는가?> - 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듣고 고려인 남자들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쟁이 시작된지 일년이 지나 즉 1942년에 운명에 따라 우리 가정이 타스켄트주 고려인 꼴호스 <뽈랴르나야 스왜스다>에 이주하게 되었다. 그 때 내가 13세였는데 1947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니 어려운 전쟁시대의 아동시절이 그 꼴호스에서 지나갔다. 우리는 찬 물이 허리까지 오는 논밭에서 일했고 어린 손가락은 목화의 꼬투리의 가시에 찔려 피가 나군 하였다. 그렇게 첫 눈이 내릴 때까지 일했다. 그러니 수업도 프로그람을 줄였다.나는 어른들이 힘과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교사들은 봉급을 거의 다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해,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해!>라는 구호실천에 받쳤다.

나의 일생에서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형제처럼 지낸  친구인 양원식이와 처음 만나게 된것은 3년간 지속되었고 근 3백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그야말로 무자비한 동족상쟁인 6.25남북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가을이였다. 민족보위상 명령에 의하여 제대된  많은 젊은 군인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 떠나고 있을 때 나는 외국 유학을 추천받고 전선에서 바로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고성에서 외국유학을 추천받은 젊은 군인 일행과 함께 평양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 향했다. 제대수속을 끝낸후   기차를 타고 의주유학생 강습소로 떠났다. 나는 유학가는 젊은이 일행의 인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기차가 안주역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내가 인솔하는 젊은이들 중 하사관 한명이 내앞에 나타나 부동자세를 취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