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작가, 소설가 한진 선생 탄생 85주년에 부쳐-

우리는 8월 17일에 한진 선생 탄생 85주년을 맞았다. 선생은 고려인 문화예술 전반이 편안함과 익숙함에 물들어 가던 타성의 시대에 홀연히 등장하여 우리 문학과 예술을 발전과 향상의 길로 쉼없이 이끌어온 지성인이자 시대의 선단에 서서 먼 앞날을 내다본 예언자였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고려극장의 중흥을 이루었고 산문작가로서 고려인 한글문학의 수준을 큰 폭으로 높였으며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고려인분과 위원장으로서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고려인 작가 단행본을 연달아 펴낸 분이다. 또한 선생은 개인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모진 아픔을 겪었으나 이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일구어낸 개척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사를 주의 깊게 읽는 독자가 기억한다면, 필자는 지난 기사에서 통일에 관련된 정책과 실천적 대책 강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기관인 통일부입니다. 그러면 이런 정부기관이 북한에도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왜냐 하면 조국통일이 북한의 대외정책 중에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관련된 정보가 빈약한 관계로 어디에서 누가 북한의 통일개념을 수립하는가, 그리고 남북한의 관계 상황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 그리고 두 나라간 경제, 문화 및 인문학적 쌍방관계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게 합니다.

먼 1982년 3월이었다. 젊기는 하지만 비교적 경험을 축적한 기자가 추운 하바롭쓰크에서 따뜻하고 손님후대하는 사과의 도시 알마아따로 왔다. 그 때 그는 그당시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에서 방금 태여나기 시작하는 고려인 사회운동의 발기자들중 하나로 되며 구 쏘련 지역에서 러문으로 된 첫 고려신문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될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얼마전에 <러시아 고려인들>신문 총주필이며 사회동가이며 로련 공훈문화 활동가인 천 왈렌찐이 탄생 70주년을 맞이했다. 창작 사업의 오랜 길을 걸어 온 그는 여전히 택한 직업에 충실하며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창작적 고봉을 향하여 걷고 있다.

우리 노인단의 낚시꾼들은 캅차가이호수 혹은 경치좋은 일리강변을 찾아   떠나는것이 습관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그날 캅차가이 호수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대단히 높았고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송이송이 떠서 캅차가이 호수를 찾아온 낚시꾼들의 마음을  가볍게 했고 더 상쾌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맑은 하늘 아래에 있는 이 호수 물은 특별히 맑게 보였고  깨끗하게 보였다.물론 이곳에서 잡는 물고기로 회를 치거나 싱싱한 물고기생선국을 끓였을 때 그 무엇에 비할수 없이 맛있는데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호의 계속)

이처럼 기독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유라시아 초원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탄압에 의해 교도가 거의 사라진 중국으로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중국 재전래를 입증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오늘날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팡산에 있는 ‘십자사라는 절에서 발견된 십자가가 좋은 예이다.

4. 고려인들의 문화 생활

1) 고려극장   

 고려극장은 1932년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원동변강조선극장으로 창립되었다. 극동의 고려극장도 강제이주시기인 1937년 9월 2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제이주의 첫 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했다. 이 열차에는 고려극장의 배우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일꾼들, “선봉” 신문사 직원들 , 조선 사범대학의 교직원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