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알마티알파라비국립대 동방학부에서 진행되는 말하기 대회는 전국 각 지역들의 대학생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한양대 국제협력부 및 남서울대 국제협력부 처장님들의 노력으로 말하기 대회가  진행되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고려인 청소년 오케스트라 ‘아리랑’이 창단됐다. 25일 고려인청소년문화센터에서 창단식을 가진 ‘아리랑’은 단원을 확대 모집해 점차 규모를 키워 나갈 계획이다.고려인 마을(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소재)에 창단된 ‘아리랑’은 현악기 위주의 스트링 오케스트라로 구성됐다. 명칭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노래에서 따왔다. 

전승절 전야에 망기스따우주 고려인 소수민족연합 <조선>열성자들은 다가오는 전승절과 관련하여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로병들과 로동전선 참가자들을 축하하였다.

해마다 위대한 전승절이 가까워 올수록 될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우리의 손우 세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가 어떻게 전쟁을 겪었으며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무엇을 달성했는가를 알았으면 한다. 전쟁시대에 왜 고려인들을 붉은 군대에 동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조국을 수호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하는 질문이 나를 고민에 잠기게 하였다. <건강한 사나이가 왜 전선에 나가지 않는가?> - 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듣고 고려인 남자들이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쟁이 시작된지 일년이 지나 즉 1942년에 운명에 따라 우리 가정이 타스켄트주 고려인 꼴호스 <뽈랴르나야 스왜스다>에 이주하게 되었다. 그 때 내가 13세였는데 1947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니 어려운 전쟁시대의 아동시절이 그 꼴호스에서 지나갔다. 우리는 찬 물이 허리까지 오는 논밭에서 일했고 어린 손가락은 목화의 꼬투리의 가시에 찔려 피가 나군 하였다. 그렇게 첫 눈이 내릴 때까지 일했다. 그러니 수업도 프로그람을 줄였다.나는 어른들이 힘과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교사들은 봉급을 거의 다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해,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해!>라는 구호실천에 받쳤다.

나의 일생에서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형제처럼 지낸  친구인 양원식이와 처음 만나게 된것은 3년간 지속되었고 근 3백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그야말로 무자비한 동족상쟁인 6.25남북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가을이였다. 민족보위상 명령에 의하여 제대된  많은 젊은 군인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 떠나고 있을 때 나는 외국 유학을 추천받고 전선에서 바로  외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고성에서 외국유학을 추천받은 젊은 군인 일행과 함께 평양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로 향했다. 제대수속을 끝낸후   기차를 타고 의주유학생 강습소로 떠났다. 나는 유학가는 젊은이 일행의 인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기차가 안주역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내가 인솔하는 젊은이들 중 하사관 한명이 내앞에 나타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고려인 화가에 대해 연구를 하기 로 결심했을 무렵(2017.04경) 처음으로 알게 된 화가가 문빅토르이다. 그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전시를 열었던 작가이다. 2017년 9월경에 국회의사당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아픈 기억 꿈꾸는 희망’의 개인전을 개최했을 때 잠시 뵈었던 인연이 있다. 그 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이번 카자흐스탄에 처음 갖게 되었다. 그의 친절함으로, 알마티에서 토막토막 이동 시간을 활용하여 세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1951년 카자흐스탄의 남동부 도시인 우슈토베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사용하시던 할머니와 홀어머니(박 시나이) 사이에서 자랐기에, 한국어를 곧 잘 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11살 때 그곳으로 강제이주를 왔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찍 헤어지셔서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뿌리인 ‘문평 문씨(文平文氏)’에 대해 알고 싶은 갈증을 느껴, 여러 차례 문씨의 본 고장인 광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어렸을 적 그의 집이 너무나도 가난하였기에, 그림을 통해서나마 세상을 미화하고 싶어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